본문 바로가기
문화사

근대인도문명 1편. 영국의 인도침략

by 니루루 2022. 9. 25.

이번 포스팅에서는 근대 인도 문명에 대한 시리즈 1편으로 영국의 인도침략에 대한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영국과 인도의 무역


영국은 동인도회사가 1717년에 공무역에 대한 관세 면제권을 획득하면서 인도와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관세 면제특권은 공무역에만 주어졌지만 당시 벵골 정부 관리들의 타락으로 사무역에도 공공연히 면세 무역이 행해졌다. 이로 인해 벵골정부는 조세수입에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1757년에 벵골과 플라시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플라시 전투는 소규모였지만 대단히 큰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투 이후 동인도회사는 궁정 모반을 책동하여 나왔을 살해하고 새 나왔을 앉혔다. 꼭두각시 나왑은 동인도회사에게 벵골로부터 비하르와 오릿사 지방까지 확대된 관세 면제특권을 부여하고 동인도회사는 나아가 1765년에 벵골, 비하르, 오릿사 지방의 디와니(징세권)를 확보하였다. 


이를 계기로 벵골지방은 동인도회사의 식민지가 되었고, 영국은 광대한 벵골의 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손에 들어간 벵골의 부는 인도 침략에 쓰일 군과 행정의 조직에 적극 활용되었다. 또 벵골의 상품을 벵골에서 확보한 조세로 구매하여 유럽 각국과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벵골로부터 확보한 부는 자국의 산업혁명의 큰 기반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플라시 전투의 1757년을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의 시작으로 본다.

 

영국의 식민지배 체제 확립


초대 총독 위런 헤이스팅스는 경제력 확장을 주로 하면서 동시에 모든 토후 세력들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상호 간에 전쟁을 유발하는 분할 통제를 하였다. 영국은 제4대 총독 웰리슬리경 하에서 본격적인 팽창정책을 시작하였다. 우선 독립토후는 동맹관계 또는 보호조약 하에 놓았다.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군대 주둔을 허용하게 함으로써 영국은 대규모의 침략 군대를 인도 측의 비용으로 현지에 유지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인도는 독립군사력을 상실하여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하면서도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경제력이 파탄에 이르렀다. 영국은 1789년 하이드라바드와 첫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해산하고 결국 병합시켰다. 

1801년에는 아와드를 보호조약 상태로 놓아 실질적으로 북부 인도의 정치 경제를 복속시켰다. 둘째로, 위 토후국에 예속되어있는 소군 주의 영토는 영국령에 편입하였다. 셋째로, 적대 토후세력은 무력으로 토벌하여 병합하였다. 마이소르의 술탄 티푸는 조약 체결을 끝까지 거부하고 근대식 군대를 육성하고 프랑스, 터키 등과 반영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에 영국은 마이소르를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웰리슬리 총독은 이러한 외교정책으로 인도의 거의 모든 세력을 병합하였다. 

총독 헤이스팅스 경은 제3차 마라타 영국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괴뢰국 사타라를 세워 인도 완전 병합의 길목을 열었다. 인도의 완전병합은 달 하우시 총독 재임 시에 이루어졌다. 그는 조직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1849년 제2차 시크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시크 왕국을 정복하여 반발세력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그는 실권원칙이라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사용해 각 세력의 군주가 후사 없이 죽거나 실정이 계속된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토후국을 병합하였다. 1856년에 영국은 인도의 완전 병합을 이루었다.

 

인도의 고대문명 2편. 베다시대의 문화

 

인도의 고대문명 2편. 베다시대의 문화

1. 아리아인의 인도정착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왔다. 이란을 거쳐 들어온 아리아인들은 인더스강 주변에 일시 정착했다. 유목민인 그들의 주산업은 목축이었고, 말과 마차

3h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