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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근대인도문명 2편. 영국의 잔혹한 인도식민정책

by 니루루 2022. 9. 26.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근대인도문명 2편. 영국의 잔혹한 인도식민정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은 어떤 식으로 인도를 식민통치했을까?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벵골, 비하르, 오릿사 지방의 징세권을 확보한 1765~1772년까지의 시기에 영국은 행정구조를 개편하였다. 새 행정구조는 책임은 인도인에게 주고 권력은 그들이 갖는 이른바 이중 체제였다. 영국 의회에서 1773년의 규제법이 만들어지면서 인도의 통치는 영국 정부가 관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워런 헤이스팅스를 임명하였다. 1784년에는 피트의 인도법에 의해 영국 정부는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고 동인도회사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급기야 1813년에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독점 무역이 종식되고 영국 정부의 직접통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무역의 독점에 대한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영국 산업자본가들의 반발이었다. 영제 국의 경제정책 인도에서 거두어들인 부는 영국에서 제조업 중심의 산업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인도 경제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인도는 영국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자재의 보급과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한 존재가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벵골 지방에서 노동력 착취, 강압에 의한 생산력 증가, 가격의 인위적 형성, 인도 면제품의 자국 내 시장의 독점, 인도 제품에의 높은 관세 부과 등을 통해 벵골의 면산 업을 파산시켰다.


또 인도로부터 확보한 기술을 산업혁명의 근대식 기계 생산체제에 적용하여 자국 내 면산 업의 발달을 이루었다. 영국의 침략이 활발해지면서 교통과 통신에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우선 1839~1850년 사이의 기간에 캘커타와 델리 사이에 대로를 건설하고 강에 기선을 도입하였다. 교통체계는 철도의 부설과 함께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첫 철도부설은 1853년 붐베이-타나 간에 이루어졌고, 달 하우시 총독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들은 효율적인 경제 착취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철도를 부설하였는데, 이에 따라 철도의 대부분은 원자재의 산지와 무역항 사이에 부설하였다. 영국의 인도 침략에 드는 비용은 그 대부분이 인도 농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로 충당되었다. 1765년 동인도회사가 벵골, 비하르, 오릿사 지방의 징세권을 획득한 후 세수의 증가를 위해 제도를 바꾸었다.


총독 콘 윌리스 경은 1793년에 영대 자민다리제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자민다르에게 토지에 대한 상속과 양도를 할 수 있는 사적 소유권을 법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자민다르가 몰락하고 소작인들은 지금까지 토지에 관해 누릴 수 있던 모든 권리, 즉 반영구 소작권, 목초지나 관개시설 이용권 등을 박탈당하였다. 이 제도에 의해 새로이 형성된 자민다르들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의 11분의 10을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 11분의 1만을 본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 바쳐야 할 지세는 정액으로 고정되었고 그 액수는 매우 높게 책정되었다. 자민 다른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정해진 기일 안에 그 액수를 메워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그들의 토지는 매각되었다. 영국의 통치권이 남부와 남서부에 확고해지면서 그곳에는 영대 자민다리제를 변형시킨 개별 농민제를 새로이 도입하였다. 이것은 경작자를 토지소유자로 인정하는 제도였으나 농민의 소유권 인정은 명목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엄청난 양의 조세에 시달렸고 그 조세는 고정되지 않고 20~30년마다 증가하였다. 영국 통치자들은 펀자브 등에서는 영대 자민다리제를 변형시킨 촌락 공동체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촌락 지를 구획 단위로 하여 그곳의 소유권자인 촌장이나 지주를 통해 공동으로 조세를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조세량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상향 조정되었다. 새로운 토지제도는 농민에게서 토지를 강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토지에서 완전히 유리된 농민은 그들의 삶을 대지주와 대상인들의 고리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농촌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 정책의 가장 큰 특색은 부의 유출이다. 역사상 어느 외래 통치자와 달리 영국은 인도에서 불법으로 확보한 엄청난 부를 자국으로 유출시켰다. 이러한 부의 유출을 두고 당시 마드라스의 조세 국장으로 있던 존 술리반은 "우리의 체제는 마치 스펀지와 같아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스강에 짜는 것 같다."라고 했다. 부의 유출 정책으로 인해 인도의 농촌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극심한 조세 수탈로 인하여 농민의 생계를 심하게 위협받았다. 이는 기근과 홍수로 인한 대참사와 직결되어, 인구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가 굶어 죽는 지방이 숱하게 발생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인도에도 기계산업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1850년대의 면 황마 산업과 채탄 산업에 이어 채광, 제분, 목재, 피혁, 모직, 제지, 제당산업 등에 기계가 등장하고 1930년대에는 시멘트, 유리, 성냥 제조 등의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영국 자본이었다. 이 시기 인도 산업의 발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플랜테이션 산업의 성장이었다. 절대적으로 유럽 자본 소유 가운데에서 인도인들은 노예 수준의 단순 노동력만 제공하였다. 그 가운데 아편은 중국에 수출되어 중국의 침략에 결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인도문명 3편

 

근대인도문명 3편.

영제국의 행정구조 영국은 영토를 넓힌 후 효율적인 통치와 착취를 위해 행정조직을 대폭 개선하였다. 그들은 행정 문관, 군대, 경찰, 법원 등으로 구성된 영국식 행정체계를 도입하였다. 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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