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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고대 그리스 문명 3편

by 니루루 2022. 10. 8.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폴리스들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정복자인 도리아인의 국가로서 선주민을 예속시켜 강압적으로 지배한 전형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스파르타인은 초기의 귀족제에서 민주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과두제 체제를 굳혔다.

 

한편, 아테네인들은 이오니아 인들의 국가로서 민주제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국가였다. 스파르타인은 육군 국가여서 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의 내륙지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아테네인은 해상국가로서 에게해 연안의 국가들과 섬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파르타인의 사회

스파르타인은 정복국가로서 소수의 자유시민들이 다수의 피정복민을 무력으로 지배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래서 국가우녕의 절대적인 목표는 다수의 피정복민을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인의 영토 내에는 3개의 서로 다른 신분이 함께 존재했다. 사유민인 시민, 반예속민인 페리오이코이, 예속민인 헤일로타이가 그것들이다.

 

가장 상류층은 스파르타 시민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체 주민의 약 5%에 해당하는 소수였다. 이들은 '동등한 사람들'로서 폴리스국정의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생산활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국내 치안과 대외적인 방비를 위한 전사의 임무에만 전념했다.

 

그들은 개개인의 가정생활보다 폴리스의 집단생활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스파르타인의 집단생활은 소년시절부터 시작된다. 7살이 되면 그들은 가정을 떠나 국가의 집단교육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때 전사로서의 소양인 무예, 극기, 절제, 그리고 불굴의 생존력을 연마하는데, 예속민인 헤일로타이에 대한 적개심도 함께 기른다. 그런 후 20세가 되면, 정식으로 시민이 되고, 성인 전사집단에서 숙식을 같이 하는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이 곧 '동등한 사람들'이었다,

 

스파르타의 예속민들

다음으로 페리오이코이는 '주변 주민들'이라는 뜻인데, 평야지대 주변의 변경에 사는 반예속민이었다. 이들은 자치를 행할 수 있었으나, 스파르타 시민으로서의 참정권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자체의 토지를 경작했으며 상업이나 수공업에도 종사했다. 예속민인 헤일로타이는 농업에 종사하여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일정량의 수확량을 바쳐야 했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전사로서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끔 물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 시민들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으며, 억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는 무장봉기를 수차례 일으키기도 했으나, 기원전 4세기까지는 스파르타인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고통받는 생활을 해야 했다.

 

스파르타인의 과두제

스파르타인들은 참주정 과정을 겪지 않았다. 그들은 메세니아인을 정복하여 새로운 토지를 획득하고 그들을 헤일로타이로 예속시킴으로써 스파르타 시민들 간의 부의 편중을 막았다. 스파르타인의 정체가 확립된 것은 기원전 7세기의 전설적인 입법가 라쿠르고스의 대법령에 의해서였다.

 

왕제의 유습으로 두 명의 왕이 존재했지만, 전쟁이나 원정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거의 실권을 지니지 못했다, 행정상의 실권을 지닌 것은 감찰관 5인이었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또 법안제출권과 재판권을 보유한 원로회와 법안을 의결하고 관리를 선출하는 전체 시민의 모임인 민회가 있었다.

 

국가정책의 최종 결정권이 민회에 있었지만, 민회에서는 발의나 토론이 허용되지 않았고 투표방식도 함성에 의한 것이어서 민회의 독자적인 권리가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동등한 지위가 인정되어 민주제 요인이 있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유력자의 모임인 원로회가 국정을 주도해 나간 셈이어서 일종의 자유화된 과두제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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