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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고대 그리스 문명 4편

by 니루루 2022. 10. 10.

1. 아테네 민주정 발전의 배경

한편 아테네 인들은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아테네 인들도 초기에는 상류 가문의 대지주인 귀족들만이 폴리스의 국정에 참여하는 귀족정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전투방식은 기병 중심의 전술이어서 말을 사육하고 전차 등의 값비싼 전투장비를 스스로 구비할 수 있는 토지 귀족층이 국가의 방위를 전담하던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명문가문으로서의 부와 위세, 그리고 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헌을 바탕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귀족세력의 정치독점에 대한 도전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식민 운동 이후 부쩍 활발해진 교역활동과 수공업 생산에 힘입어 부유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군사전술상의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소수의 기병중심의 전술에서 벗어나 사각 밀집대형인 팔랑크스를 주축으로 하는 중갑보명전술로 바뀌었던 것이다. 중갑보병에 주로 충원된 세력은 중농 이상의 농민들, 부유한 상인, 수공업자들이었다. 이들이 국가의 방위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면서 폴리스 내에서의 그 발언권과 책임이 증대되었다.

2. 솔론의 개혁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아테네인들 가운데 교역과 수공업생산에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나타난 반면, 또 한편으로는 흉작과 부채(負債)로 더욱 가난해진 농민들도 많아졌다. 빈곤해진 농민들은 부채를 갚지 못해 토지를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지주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야흐로 공동체인 폴리스가 수탈하는 부유층과 수탈당하는 빈민층으로 분열되는 무법과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었다. 참주의 등장이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솔론(Solon)이었다. 그는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이 되자 혈통에 의해 참정권이 제한되던 과거의 방식 대신 재산의 등급에 따라 참정권을 차등부여하는 금권정치(Timokratia)를 실시했다. 솔론은 빈곤한 시민들의 기존 부채를 말소하고 이후에는 인신(人身)을 저당으로 하는 부채를 무효화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여 빈곤한 시민들의 경제적 예속을 방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민회의 예비모임인 400인 협의회를 새로 만들고 시민들에 대한 법의 보호를 강화하는 사법개혁을 실시하는 등 장래 아테네인의 법제의 기본적인 바탕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가 표방한 정책은 기존 정체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 현실상황을 반영하는 법의 제정을 통해 귀족층의 부당한 수탈을방지하려는 소극적인 개혁이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그는 당시 아테네 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솔론의 개혁 시도는 아테네시 민단 내의 갈등과 분열을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3.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성립

이때 등장한 것이 참주정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46-545년에 무력을 사용하여 참주가 되었다. 그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추방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하였으며 빈농에게는 영농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업을 장려하여 특히 흑해 연안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그는 아크로폴리스언덕에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벌이고 아테나 여신과 디오니소스(Dionysos) 신(神)을 위한 대제전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그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귀족세력을 약화시켜 이후 민주제 발전에 도움을 주고 아테네인의 문화발전에도 나름의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제도적인 개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그의 개인적인 권력과 자질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들이 참주정을 이어받았을 때, 아테네인은 참주정을 타도하고 참주의 재현을 방지하려는 도편 추방제를 제정했다.

4. 중갑병 민주주의의 발전

솔론의 개혁과 참주정의 출현과정에서 아테네의 데모스는 자신의 힘으로 민주제를 이루어낼 만한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이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민주제를 위한 개혁에 나선 인물이 클레이스 테네스였다. 기원전 508년에 그는 귀족들의 권력기반이 되어 오던 4개의 혈연 부족(血緣部族)을 분산시켜 10개의 지연 부족(地緣部族)으로 개편하였다.

 

부족제 개편에 따라 400인협의회 대신 500인 협의회가 설치되고 민회의 활동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민주제 발전을 위한 제도적인 토대가 이룩된 셈이었다. 그런데 클레이스 테네스의 개혁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입은 아테네 시민은 중간층인 중갑보병층이었다. 아직 하층 시민은 국가의 운용에 참여할 만한 경제적 여력 와 여가를 갖지 못했고 국가 방위에 대한 공헌도 미약했던 것이다.

아테네인은 5세기 초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공헌을 바탕으로 그리스 내의 강국으로 부각되었다. 페르시아 군이 연이어 그리스 본토를 공격했으나 그리스인들은 마라톤(Marathon) 전투(B.C. 490)와 살라미스(Salamis) 해전 (B, C, 480)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다. 

 

동방의 강국(强國) 페르시아제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엄청난 감동과 자신감을 주었다. 그들은 그 승리의 원동력이 자유시민들의 폴리스 체제에 있다고 보아 폴리스 체제에 대한 신뢰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5.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 민주정치의 급진화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인을 지도한 국가는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이었다. 특히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승리에 결 정적인 공헌을 한 아테네인의 입지는 전후(戰後)에 크게 부상(浮上)했다. 기원전 478-477년에 창설된 델로스(Delos) 동맹은 아테네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본래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인의 재침(侵)에 대비하여 아테네인과 에게해 주변 국가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맺은 동맹이었다. 그러나 동맹 내에서 월등한 해군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테네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츰 동맹은 강압적인 제국으로 변질되었다. 아테네인은 동맹 금고의 자금을 스스로 관리하고 동맹국의 내정(政)에도 간섭했다. 델로스 동맹의 결성은 아테네인의 국내 정치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델로스동맹은 해상 동맹이었던 만큼 해군력의 양성과 유지가 관건이었는데, 사실 해군력의 주축이 아테네인이었으므로 동맹 금고의 자금은 주로 아테네인을 위해 사용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아테네인 중에서 함대의 수병에 지원하는 자들은 대개 최하층 시민인 테테스(thetes)였다. 예전에는 이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느라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 해군 복무를 통해 충분한 급료를 받고 또한 국가방위에 직접 공헌한다는 긍지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테테스층까지 포함되는 보다 완성된 민주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페리클레스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아테네인의 황금시기였으며,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인이 누린 자유와 영광은 동맹국들의 희생 위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인의 제국 지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했고,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인은 제국과 해상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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