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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근대인도문명 3편.

by 니루루 2022. 9. 27.

 

영제국의 행정구조

영국은 영토를 넓힌 후 효율적인 통치와 착취를 위해 행정조직을 대폭 개선하였다.

그들은 행정 문관, 군대, 경찰, 법원 등으로 구성된 영국식 행정체계를 도입하였다.

웰리슬리 총독은 캘커타에 포트 윌리암 대학을 건설하여

행정 문관을 전문적으로 육성하였고, 1853년 이후에는 영국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문관을 선발하였는데, 단순 하위직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영국인들이 독점하였다.

군대는 인도세력을 정벌하고 인도 내에서 경쟁 외국군으로부터 자국 세력을보호하며

내부반란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군의 대부분은 인도인 용병이었다.

반면에 장교 이상은 철저히 영국인으로만 구성되었다.

경찰의 구성도 군과 동일하였다.

식민지 인도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영국 통치자들은

인도에 민사와 형사의 양대조직을 갖추는 단일 사법체계를 갖추었다.

명목적으로는 인도가 근대적 법치국가가 되었고,

세속법의 도입으로 카스트와 종교를 초월한 만민평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관료나 경찰 등 지배층은 항상 법 테두리 밖에 있었기 때문에

전통사회의 법체계하에서보다 법의 불공평성이 훨씬 심각하였다.

 

영제국의 사회 문화정책

영국은 본격적인 팽창정책을 펴기 전까지는 인도의 종교, 사회, 문화에 대해 불간섭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인도를 거대한 시장으로 간주하면서

인도 사회와 문화의 전반적 구조를 변경시킬 필요를 느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인도 사회의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한 주장은 급진주의자들과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들은 인도문화를 야만적이고 저급하여 부패하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미신을 타파하고 사티, 조혼, 유아 살해 등과 같은 사회의 악습을 철폐하며

불가촉천민, 여성, 과부 등의 사회적 위치와 카스트 제도를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회개혁정책에 대하여 람 모한 로이를 비롯한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호응이 컸다.

그러나 영국통치자들의 인도 사회의 급진적 개혁은 인도 민족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하였고, 나아가 민족운동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통치자들은 인도 사회의 개혁을 위해 교육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그들은 동인도회사의 인도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영국의 통치에

협조할 수 있는 중간엘리트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중간 엘리트 육성을 위한 근대교육이 확산되면서 1857년에는

캘커타, 봄베이, 카드라스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는 "인도인의 피와 피부에 영국인의 기호와 사고, 도덕 등을 가진 계급의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교육의 도입은 그들의 의도와 달리 전체 인도 국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다.

즉, 상층부를 위해 도입된 근대교육의 내용이 신문, 집회, 정당 등을 통하여

아래로 널리 파급되었고, 이로써 인도의 민중들은 서구에서 발달한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도사회의 근대화와 민족운동의 발생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