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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서아시아 2편. 이슬람교의 성립

by 니루루 2022. 9. 3.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아시아 시리즈 2편, 이슬람교의 성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슬람교의 성립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는 베두인이라고 불리는 사막의 유목민과 쿠레이쉬 부족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정착민들이 부족단위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다신교와 협의체 의사결정방식을 토대로 한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메카는 오아시스 대상 교역의 중심도시로 또 각 부족의 우상을 모슨 순례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욱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걸프 해를 잇는 전통적인 실크로드가 위축되자 홍해 연안의 대상로를 통한 동서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메카와 메디나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급격히 번창하게 되었다. 부의 급증으로 인한 빈부의 갈등, 우상숭배의 만연, 도덕과 윤리의 타락이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였다.

 

2. 마호메트의 등장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마호메트는 이러한 시기에 메카의 명문 쿠레이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와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험난한 대상 활동에 종사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의 대상 여행을 통해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하였고,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마호메트는 명상생활을 통해 병든 인간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였다. 오랜 명상 끝에 그의 나이 40세 되던 612년 드디어 신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계급과 우상숭배의 타파, 혈연과 인종,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 사상인 이슬람을 완성하였다.

 

3. 이슬람교의 사상

이슬람은 절대자이고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고 있으며, 언어학적으로는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마호메트는 삼위일체에 의한 기독교식 유일신 사상과는 달리 예수와 자신의 신격화를 부정하는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슬람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상의 많은 선지자들을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마호메트는 예수 이후에 신에 의해 보내진 마지막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가졌다고 본다. 즉, 이슬람교는 신 앞에 만민의 평등과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두지 않는 가르침으로 예수 이후는 기독교 사상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 하였다. 또한 현세에서의 선악의 경중에 따라 최후의 날 신의 심판을 받아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과 모든 것은 신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예속된다는 정명 사상을 갖고 있다. 그밖에 도박, 마약, 고리대금, 술과 돼지고기,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육류를 금하며, 특수한 상황에서 일부다처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4. 이슬람 신앙의례

이러한 이슬람의 실천강령과 신앙체계는 흔히 오주 육신으로 압축되는데, 모슬렘들의 5대 의무는 신앙의 고백,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자선을 위한 구빈세, 라마단 한 달에 해 있는 동안의 단식, 평생에 한 번 메카의 순례 등이다. 또한 이슬람의 가르침은 마호메트의 계시 내용을 담은 코란에 집대성되어 있으며, 코란과 함께 그의 선별된 언행록인 하디스가 경전으로 삶의 구체적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622년 마호메트와 그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것을 헤지라라 하여 순 태음력인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건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마호메트는 세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630년 메카에 무혈입성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의 확장에 성공하였다.

 

5. 정통 칼리프시대의 개막

이슬람 공동체의 성장은 632년 마호메트가 타계함으로써 일시 위기에 봉착했으나, 이슬람식 합의제 선출을 통한 칼리프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였다. 칼리프는 정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최고 통치자로서, 마호메트의 후계자로 이슬람 공동체를 확장해 나갔다. 이후 바르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에 이르는 네 칼리프의 통치시기를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리프 시대라 부른다.

 

6. 이슬람의 정복사업

이 시기에 적극적인 대외정복이 이루어져, 비잔틴 치하의 시리아가 정복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다.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이와 같이 단시일에 정복사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은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종교가 기독교보다 더욱 철저한 일신교로서 종교에 대한 긍지가 강했고, 그들이 진출한 지역에 로마 교회의 삼위일체 사상에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나 단성론자들이 집단 거주하여 이슬람의 교리가 훨씬 스며들기 쉬웠던 요인도 있다. 더욱이 신의 뜻을 위해 싸우는 지하드의 개념이 종교적 정열과 함께 전리품의 노획이라는 현실적 동기부여를 조장해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7. 정통 칼리프시대의 종식

이슬람 세력의 이러한 급속한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서구 학자들은 흔히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급격한 정복사업으로 영토가 강대해지면서 부족간의 이견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2대 칼리프 우마르와 3대 칼리프인 오스만, 4대 칼리프 알리가 모두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다. 특히 마호메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가 되자 칼리프 오스만의 세력을 대표하는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알리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알리가 암살당하자 이슬람 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위야 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은 이미 상당한 이탈세력이 생겨, 알리를 추종하는 정치세력들이 전대 칼리프들과 새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시아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되었다.

 

 

 

서아시아 3편. 우마위야 왕조 (661~750)

1. 우마위야 새 왕조의 과제는 분열되고 약화된 이슬람 제국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역대 군주들은 종래의 이슬람 신정제를 탈피하여, 아랍 부족 중심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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