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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서아시아 5편. 투르크 이슬람 시대의 개막

by 니루루 2022. 9. 10.

이번 포스팅은 서아시아 역사 시리즈 5편, 투르크 이슬람 시대의 개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통일

 

분열되었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 왕조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그들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셀주크 투르크는 3대 술탄 말리크 샤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를 포함하여 동쪽은 천산산맥에서 서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특히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여러 뛰어난 개혁정책은 셀주크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십자군 전쟁

한편,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셀주크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압박은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여, 이후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가 근 200년 동안 서로 치열하게 격돌하였다.

아바스 제국의 멸망과 투르크인 시대의 개막

셀주크 왕조는 1157년 술탄 산자르의 사후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셀주크 왕조는 아나톨리아의 터키 셀주크 왕조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다가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진출해 오던 몽골에 예속되었다. 한편 1256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제국의 대간인 몽케의 동생 홀라구가 사마트 칸트 총독으로 부임한 후, 1258년 2월 대규모 군대로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아바스 제국이 멸망하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아랍이 주도하던 이슬람 시대의 실질적이고 공식적인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제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제국이 관장하는 터키인 중심의 체제로 변환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

셀주크의 와해로 몽골의 종주권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에 셀주크 치하의 강력한 부족장이었던 오스만 베이에 의해 1299년 공국이 수립되었다. 이 오스만 공국을 1922년까지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시발로 본다. 주로 비잔틴 영토에 대한 잠식으로 시작된 오스만의 정복사업은 그의 아들 오르한 시대에 이미 유럽의 발칸반도에 진출하여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하였다. 1361년 아드리아노플의 정복으로 시작된 발칸 공략은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인 티무르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그 의의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으로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것은 1453년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서였다.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군대의 전통적 군율에 따라 3일간 약탈이 허용되었다. 3일째 모든 무질서가 종식되고 비잔틴 시민의 생명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공표되었다. 비잔틴의 1,000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되었다. 비잔틴 정신의 상징이었던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기독교 정교의 비잔틴이 이슬람교의 오스만에 귀속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 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리는 대항해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에서 16세기 말까지 이르는 시기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로서 그 영토가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에 이르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걸프 해에까지 이르러, 과거 이슬람 세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예니체리 제도

오스만제국의 확장과 번영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었다. 우선 귀족세력의 견제를 통한 술탄의 중앙집권화와 효과적인 전투력 배양을 위해 예니체리 군대가 결성되었다. 예니체리는 근위보병부대로서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또 술탄은 예니체리 부대의 운영과 강화를 위해 새로운 정복지의 이권을 그들에게 분배하고, 병력 충원을 위해 데브쉬르메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데브쉬르메는 주로 발칸반도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하여 엄격한 훈련과 투르크화 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술탄의 친위부대인 예니체리에 배속시키는 제도였다.

밀레트 제도

오스만제국 속에 편입된 다양한 이질 집단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는 밀레트 제도가 있다. 밀레트는 제국 내의 피지배계층에게 허락된 종교와 민족에 따른 민족자치공동체를 의미한다. 밀레트 내에서는 독자적인 관습법과 문화적 자율성이 보장되었으며,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는 각 종교 수장들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도 모든 밀레트 구성원은 개인의 능력과 계기에 따라 사회적인 출세를 할 수도 있었고, 개종하여 다른 밀레트로 이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개종에 의한 밀레트 이동은 각 밀레트가 가지는 사회 종교적인 연대감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토지와 조세제도

한편, 토지와 조세제도에 있어서는 이슬람법의 테두리 안에서 비모 슬렘들의 소유 토지에서 징수하는 하라지와 모슬렘 토지세인 외시리가 중요하였다. 하라지의 세율은 생산량의 10~20%, 외시리는 10% 정도였는데, 두 종류의 토지소유자들은 토지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로운 매매나 증여, 상속이 가능하였다. 이와 함께 무카타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이는 국가가 직접 토지를 소유하여 그 수익이 국고에 귀속시키는 토지제도였다.

법체제

오스만법의 특징은 이슬람법인 샤리아와 세속 법인 카눈으로 이원화된 법 구성을 들 수 있다. 샤리아는 모든 모슬렘 사회의 근본이 되는 모법으로, 코란과 하디스에 근거하는 법체계이다.

 

 

 

서아시아 6편. 탄지마트 개혁

1. 오스만 제국의 쇠퇴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내외적인 요인이 복합되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적인 요인으로는 술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권력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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