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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고대인도문명 3편.

by 니루루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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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시대의 사회와 문화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경에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가 제상 카우 틸리아의 도움을 받아 난다 왕조를 전복시키고 창건하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에서 시작하여 데칸 이남과 동부의 칼링가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아대륙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빈두사라, 아소카가 계승하였다.

아소카는 왕위에 오르자 칼링가 왕국을 무력으로 병합시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10만명이 죽고, 15만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병합 후 아소카는 무력전쟁에 의한 정복정책을 포기하고 다르마에 의한 문화 정복 정책을 취했다.

그는 브라만교의 제사행위를 금지하였다. 

그는 최초로 형성된 통일제국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전체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일종의 국민정신으로서의 고도의 사회윤리사상을 정책으로 삼은 것이다.

아소카는 그의 평화사상을 서아시아와 그리스에까지 전파하였고 이를 위해 각국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또 불교를 아시아 각국에 전파하였다. 

제사를 금한 다르마정책은 브라만들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그들의 반발을 샀다.

또 거대한 규모의 군사와 행정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인하여 경제위기가 왔고, 지방관리들의 압제도 매우 심했다.

이러한 것들이 겹쳐 아소카가 죽은 직후 마우리아 제국은 브라만인 푸시아 미트라 슝가에 의해 전복당했다.

외부요인으로 중국의 진시황에 의한 만리장성 축조와 그로 인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인도 침입도 들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소카의 적극적인 문화보급에서 찾을 수 있다.

마가 다지 방의 발달된 철기문화는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보급되어 그곳의 물질문화를 발달시켰다.

지방에서 강력한 세력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미우리아 왕조에서는 정부가 산업의 각 부분을 직접 통제하였다. 농업에 대규모의 노예를 고용하였으며 국토의 간선도로를 확충하는 등 고대국가체계를 확실히 다졌다.

조세제도의 정착과 화폐경제의 활성화를 이루었고, 발달된 철기문화를 전국으로 보급하였다.

 

서북부와 남부 인도

 

기원전 326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서북부 인도를 점령하여 약 200년간 통치하고 그 뒤를 이어 알렉산더가 인도를 침입하고 물러난 후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알렉산더가 물러간 후 마우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박트리아, 파르티아, 스키타이, 샤카, 쿠샤나의 침입과 통치가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쿠샤나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쿠샤나는 옥서스 강에서 갠지스강에 이르는 강대한 제국을 이룩하였다.

카니슈카 왕은 마하야나 불교를 보호하고 널리 전파하였다.

쿠샤나는 한과 로마 사이의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였고, 중앙아시아의 많은 금광을 확보하면서 많은 양의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마우리아 왕조 이후 데칸과 중부지방은 슝가, 칸바, 사타바흐나 등이 지배하였다.

그 가운데 사타바흐나는 데칸을 중심으로 약 300년간 통치하면서 마우리아에 의해 보급된 마가다의 발달된 브라만 문화를 정착시켰다.

사 타 바흐 나도 쿠샤나와 마찬가지로 로마와의 왕성한 무역에 힘입어 경제가 매우 발전하였다. 무

역, 수공업 등이 매우 발달하였고, 여러 도시가 융성하였다. 기원 초기의 이 시기가 고대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시기였다.

 

굽타 시대의 사회와 문화

굽타 제국은 320년경 찬드라 굽타 1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뒤를 이은 사무드라 굽타는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영토확장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서부의 일부 지역과 남부의 타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의 행정 통치의 어려움 때문에 데칸 이남지역은 독립시켜 주어 그곳에 바카타카 왕국이 세워졌다.

그 후 찬드라굽타 2세는 무역의 거점인 서부지역을 확보하여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후 오랫동안 평화시대가 계속되었다.

굽타 왕조는 봉건 통치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절대왕권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상대적으로 제후들의 권력이 강대하였다.

결국 굽 타제 국은 봉건 제후들의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6세기 초에 소왕국으로 전락하다가 사라졌다.

굽타의 몰락을 부추긴 또 다른 원인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오던 로마와의 무역의 단절이었다.

로마는 인도와의 무역으로 인해 금의 유출이 극심하였고, 그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자 인도와의 무역을 단절하였다.

그 결과 인도에서는 도시가 몰락하고 봉건 경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굽타시대에는 고대문화가 융성하였다.

칼리 다사의 사쿤탈라,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인도 전통의 역사서라 할 수 있는 푸라나, 마누 법전을 비롯한 많은 법전들이 이 시대에 나왔다. 언어학, 수학, 천문학, 과학, 예술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힌두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는 전적으로 브라만 중심의 귀족문화였으며, 말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크게 침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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