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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31

그리스 고대 문명 1편 크레타 문명 고대 서양의 문명은 지중해에 자리 잡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의 고대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에게해 남쪽에 살던 크레타인들이었다. 이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이룩한 지중해 최초의 청동기문명이 크레타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의 유적을 발굴한 공로자는 영국인 고고학자 에반스였는데, 그는 1900년에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터를 발굴했다. 당시 크레타는 한 명의 강력한 왕에 의해 통치되는 통일왕국이 아니고, 여러 왕들이 각기 자신의 영역을 분할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는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및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교역과 수공업의 번성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0.. 2022. 10. 6.
동남아시아 역사 5편. 미얀마,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1. 미얀마의 민족운동 미얀마의 민족주의 운동은 인도 국민회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920년에는 랭군대학이 설립되어, 이 대학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미얀마는 1937년까지 사실상 인도의 한 주였기 때문에 미얀마의 민족주의 운동은 때로는 인도로부터의 해방운동이 되었다. 1921년 불교청년회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불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꾀하였고, 세계적 경제공황의 여파가 미친 1930년 하부 미얀마에서 사야 산이 고대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1931년 말 런던에서 미얀마의 장래에 관한 원탁회의가 열려 인도분리주의자와 인도 분리 반대파로 의견이 갈라졌으나 결국 바 모의 노력으로 1937년 미얀마를 인도로부터 분리하게 되었다. 2. 타킨 운동 한편 영.. 2022. 10. 5.
동남아시아 역사 4편. 1. 라마 6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타이의 여론은 친독적이었다. 일찍이 영국과 프랑스에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고 독일은 철도개발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마 6세는 중립을 지키다 1917년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결과 타이는 파기 강화 회의에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국제연맹에도 가입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불평등 조약 폐기를 위한 조략은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외무성 고문으로 있던 새(Sayre)의 역할이 컸다. 2. 피 분과 프리디 라마 7세 때인 1932년 피분, 프리디 등이 무혈혁명을 일으켜 타이는 입헌군주국이 되고, 국왕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헌정 혁명 이후 타이의 .. 2022. 10. 4.
동남아시아 역사 3편.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래플즈 말레이에도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세력이 진출하였으나 겨국 영국한테 밀렸다. 영국은 프랑스혁명 때 네덜란드가 점령 당한 틈을 이용하여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손에 넣고, 말레이반도는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려주지 않았다. 1819년 래플즈는 싱가포르에 영국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824년에는 영국-네덜란드 조약에 의거하여 말라카와 싱가포르가 영국에 귀속됨으로써 1826년 말라카, 싱가포르, 페낭을 합하여 해협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초 타이는 이미 말레이 북부 4개 속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의 진출로 페라크와 셀랑고르에의 진출은 포기하였다.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1867년 영국 식민성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영국은 1895년 해협.. 2022. 10. 3.
동남아시아 역사 동남아시아의 태동 동남아시아 각국의 고대역사는 캄보디아,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거의 추적할 수 없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각국간의 교섭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고대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푸난과 첸라 1~2세기에 동남아 최초의 국가가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푸난으로 오늘날의 캄보디아 지방에 해당되며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푸난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자야워라만 1세 때 전성기였으나, 6세기 말 약화되고 첸라가 7세기에 캄보디아, 라오스 전역을 통일했다. 첸라는 곧 남쪽의 물첸라, 북쪽의 뭍첸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 자야워라만 2세에 의해 재통일되고 앙코르왕국이 건설되었다. 앙코르 왕조 자야워라만 2세부터 앙코르 톰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이후를 앙코르 왕조라 .. 2022. 9. 30.
근대인도문명 5편. 간디의 등장과 독립투쟁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틸락이 사망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민족운동진영은 분열되어 있었다. 반면에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식민착취를 극대화하였고 강권통치로 일관하였다. 이때 간디가 등장하였다. 그에게는 인도민족의 단합이 기본 전제였고, 그 위에서 완전자치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폭력을 쓰는 상대방에게 진리에 기초한 비폭력의 힘으로 저항하여 양심의 가책과 사랑을 유발시켜 승리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이를 사티야그라하라 한다. 간디는 1919년에 로울라트법안이 통과되자 하르탈(파업)을 사용하여 저항하였다. 이 법안의 뼈대는 인도인을 영장이나 재판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고, 언론 사상 집회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민중은 종파에 관계없이 민족운동에 .. 2022. 9. 28.
근대인도문명 4편. 사회 종교개혁운동 영국의 근대사상과 교육의 도입에 따라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 내에서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사회개혁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람 모한 로이의 브라모 사마즈를 들 수 있다. 로이는 인도 사상의 위대함을 주창하였으나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그 도구로서 서구문화를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카스트제도의 엄격성, 우상숭배, 의식주의 등을 반대하고 사티, 조혼 등의 악습을 폐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인권신장, 남녀평등 등을 옹호하고 홍보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일어난 이러한 종교 사회개혁운동은 1857년 대반란 이후에도 계속되어 민족운동과 독립투쟁으로 연결되었다. 1857년 대반란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약 100년 만인 1857년에 델리 부근의 .. 2022. 9. 28.
근대인도문명 3편. 영제국의 행정구조 영국은 영토를 넓힌 후 효율적인 통치와 착취를 위해 행정조직을 대폭 개선하였다. 그들은 행정 문관, 군대, 경찰, 법원 등으로 구성된 영국식 행정체계를 도입하였다. 웰리슬리 총독은 캘커타에 포트 윌리암 대학을 건설하여 행정 문관을 전문적으로 육성하였고, 1853년 이후에는 영국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문관을 선발하였는데, 단순 하위직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영국인들이 독점하였다. 군대는 인도세력을 정벌하고 인도 내에서 경쟁 외국군으로부터 자국 세력을보호하며 내부반란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군의 대부분은 인도인 용병이었다. 반면에 장교 이상은 철저히 영국인으로만 구성되었다. 경찰의 구성도 군과 동일하였다. 식민지 인도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영국 통치자들은 인도에 민사와 형사.. 2022. 9. 27.
근대인도문명 2편. 영국의 잔혹한 인도식민정책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근대인도문명 2편. 영국의 잔혹한 인도식민정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은 어떤 식으로 인도를 식민통치했을까?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벵골, 비하르, 오릿사 지방의 징세권을 확보한 1765~1772년까지의 시기에 영국은 행정구조를 개편하였다. 새 행정구조는 책임은 인도인에게 주고 권력은 그들이 갖는 이른바 이중 체제였다. 영국 의회에서 1773년의 규제법이 만들어지면서 인도의 통치는 영국 정부가 관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초대 총독으로 워런 헤이스팅스를 임명하였다. 1784년에는 피트의 인도법에 의해 영국 정부는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고 동인도회사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급기야 1813년에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독점 .. 2022. 9. 26.
근대인도문명 1편. 영국의 인도침략 이번 포스팅에서는 근대 인도 문명에 대한 시리즈 1편으로 영국의 인도침략에 대한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영국과 인도의 무역 영국은 동인도회사가 1717년에 공무역에 대한 관세 면제권을 획득하면서 인도와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관세 면제특권은 공무역에만 주어졌지만 당시 벵골 정부 관리들의 타락으로 사무역에도 공공연히 면세 무역이 행해졌다. 이로 인해 벵골정부는 조세수입에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1757년에 벵골과 플라시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플라시 전투는 소규모였지만 대단히 큰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투 이후 동인도회사는 궁정 모반을 책동하여 나왔을 살해하고 새 나왔을 앉혔다. 꼭두각시 나왑은 동인도회사에게 벵골로부터 비하르와 오릿사 지방까지 확대된 관세 면제특권을 부여..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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