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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31

중세인도문명. 인도 중세사회와 문화의 발전 1. 8~12세기의 인도 사회 굽타가 몰락한 후 봉건 제후들의 패권 다툼 속에서 북부 인도는 7세기 초 카나우즈의 하르샤 바르다나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 후 8세기를 전후하여 인도는 동부의 팔라, 서부의 프라티 하라, 데칸을 중심으로 한 라슈트라쿠타의 세 나라로 갈렸다. 이 때는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침입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하였다. 종교는 밀교가 융성하고 불교와 자이나교가 크게 위축되었다. 불교사원 날란다와 비크라 마쉴라는 세계적인 교육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육은 종교, 철학, 문법학 등만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고대에 발달한 과학의 수준을 계승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학문도 발달하지 못했다. 9~12세기까지의 남부 인도에는 촐라라는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었다. 촐라는 강력.. 2022. 9. 24.
고대인도문명 4편. 고대시대의 변화 마우리아 왕조 이후 몇 세기 동안 외래민족이 끊임없이 유입되었고, 많은 부족들이 카스트 체제에 흡수되었다. 또 굽타시대 말기부터는 교역이 쇠퇴하면서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몰락하고 대거 농촌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카스트와 혼합 카스트가 많이 생겼다. 또 바이샤는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과중한 조세납부의무를 거부하고, 수드라는 용역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바르나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적인 계급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이에 군주들이 사회안정의 차원에서 브라만이나 불교 승가에 토지를 하사하여 봉건영주에 의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형성되어 갔다. 토지 하사로 농경지 확장과 브라만 문화의 전파가 함께 이루어졌다. 일단 농경지가 확충되면 농민들은 그곳에서 .. 2022. 9. 24.
고대인도문명 3편. 마우리아 시대의 사회와 문화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경에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가 제상 카우 틸리아의 도움을 받아 난다 왕조를 전복시키고 창건하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에서 시작하여 데칸 이남과 동부의 칼링가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아대륙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빈두사라, 아소카가 계승하였다. 아소카는 왕위에 오르자 칼링가 왕국을 무력으로 병합시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10만명이 죽고, 15만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병합 후 아소카는 무력전쟁에 의한 정복정책을 포기하고 다르마에 의한 문화 정복 정책을 취했다. 그는 브라만교의 제사행위를 금지하였다. 그는 최초로 형성된 통일제국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전체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일종의 국민정신으.. 2022. 9. 24.
인도의 고대문명 2편. 베다시대의 문화 1. 아리아인의 인도정착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왔다. 이란을 거쳐 들어온 아리아인들은 인더스강 주변에 일시 정착했다. 유목민인 그들의 주산업은 목축이었고, 말과 마차를 이용해 이동생활을 하면서 청동제 무기로 토착민들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토착민들과 전쟁을 하고, 또 동화하면서 새로운 인도민족을 형성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리그 베다를 통해 당시 그들의 사회를 조명해 볼 수 있다. 리그베다는 인드라, 아그니, 바루나 등의 자연현상을 인 격화한 신들을 찬미한 노래 모음이다. 리그베다에 의하면 당시는 부족장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의 부족회의가 열렸던 부족사회였다. 이 시대에는 소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동쪽으로 이동하던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600년경 사.. 2022. 9. 23.
서아시아 7편. 이란과 아랍의 근대화 16세기 초 이란에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가 세워져 페르시아어를 바탕으로 이란의 전통문화 회복에 기여하였다.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왕 때 전성기를 맞아, 오스만 제국의 여러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문화와 경제분야에서도 수준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당시 수도 이스파한은 훌륭한 건축물과 우아한 장식물로 아름답게 꾸며져 오늘날까지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사파비 왕조가 주변 민족들의 침입으로 약화된 후, 이란 지방은 18세기 말 카자르 왕조에 의해 재통 일되었다. 1. 카자르 왕조의 근대화 카자르 왕조는 한때 아프가니스탄까지 그 영역을 넓혀 번영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열강의 간섭과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란의 근대화 과정도 유럽 열강에 대항하는 항쟁의 형태로 나.. 2022. 9. 16.
서아시아 6편. 탄지마트 개혁 1. 오스만 제국의 쇠퇴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내외적인 요인이 복합되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적인 요인으로는 술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권력의 약화와 귀족 및 지방 영주들의 발호, 예니체리 군인들의 반란, 피정복지에서의 과중한 세금, 관료와 군부의 부패 등으로 인해,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잇는 새로운 변화와 기술적 혁신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이란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사파비 왕조의 위협 증대와 1571년 스페인과의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배, 1683년의 오스만의 비엔나 공략 실패를 들 수 있다. 2. 대외 정복과 국력 쇠진 사파비 왕조의 성장은 유럽전선에 대한 오스만의 관심을 분산시켜 국력의 약화를 초래하.. 2022. 9. 12.
서아시아 5편. 투르크 이슬람 시대의 개막 이번 포스팅은 서아시아 역사 시리즈 5편, 투르크 이슬람 시대의 개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통일 분열되었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 왕조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그들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셀주크 투르크는 3대 술탄 말리크 샤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를 포함하여 동쪽은 천산산맥에서 서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특히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여러 뛰어난 개혁정책은 셀주크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십자군 전쟁 한편,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 2022. 9. 10.
서아시아 4편. 아바스 왕조 (750~1258)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아바스 왕조 우마위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의 변화는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아랍 중심의 다마스쿠스에서 페르시아 문화의 바탕인 바그다드로 옮긴 사실에서도 나타나지만, 아바스 지배층은 아랍계와 비아랍계 모슬렘의 조화로운 융합을 꾀하였다. 따라서 아바스 왕조는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후대 사가들은 흔히 우마위야 왕조까지를 아랍인이 이민족을 지배한 '아랍제국시대'로 칭한 반면, 아바스 왕조를 '이슬람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탈아랍화 정책 이 왕조에서는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 .. 2022. 9. 5.
서아시아 3편. 우마위야 왕조 (661~750) 1. 우마위야 새 왕조의 과제는 분열되고 약화된 이슬람 제국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역대 군주들은 종래의 이슬람 신정제를 탈피하여, 아랍 부족 중심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한 시도의 첫 번째로 제국의 중심을 메디나에서 비잔틴제국의 동부 수도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정주화에 착수하여 수많은 요새와 건축물을 축조하였다. 2. 영토확장 우마위야 시대에 영토는 더욱 넓어져 동으로는 헤라트, 카불,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파미르공원을 경계로 당나라와 접경하게 되었고, 710년에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모체가 된 신드주와 펀자브주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서로는 비잔틴제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여, 비잔틴의 군소 속령을 차지하고 두.. 2022. 9. 4.
서아시아 2편. 이슬람교의 성립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아시아 시리즈 2편, 이슬람교의 성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슬람교의 성립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는 베두인이라고 불리는 사막의 유목민과 쿠레이쉬 부족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정착민들이 부족단위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다신교와 협의체 의사결정방식을 토대로 한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메카는 오아시스 대상 교역의 중심도시로 또 각 부족의 우상을 모슨 순례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욱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걸프 해를 잇는 전통적인 실크로드가 위축되자 홍해 연안의 대상로를 통한 동서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메카와 메디나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급격히 번창하게 되었다. 부의 급증으로 인한 빈부의 갈등, 우상숭배의 만연, 도덕과 윤리의 타락이 당..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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