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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그리스 고대 문명 1편

by 니루루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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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문명

고대 서양의 문명은 지중해에 자리 잡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의 고대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에게해 남쪽에 살던 크레타인들이었다. 이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이룩한 지중해 최초의 청동기문명이 크레타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의 유적을 발굴한 공로자는 영국인 고고학자 에반스였는데, 그는 1900년에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터를 발굴했다.

 

당시 크레타는 한 명의 강력한 왕에 의해 통치되는 통일왕국이 아니고, 여러 왕들이 각기 자신의 영역을 분할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는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및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교역과 수공업의 번성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 크레타인들은 그리스 본토에까지도 그 세력권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크레타인들은 계속되는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큰 손실을 입고 결국 그리스 본토에서 성장한 미케네 인들에게 기원전 1400년경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크레타 인은 그리스인의 역사 속에 편입되지만, 그들이 동방 오리엔트와 이집트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이룩한 자신의 문화와 제도를 그리스인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동서양 교류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미케네 문명

그리스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민족으로 이들이 발칸반도 남부에 이주해 온 것은 대략 기원전 2000년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최초의 그리스인이 건설한 문명이 바로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 문명이 역사상 조재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독일의 실업가 슐리만이었다. 

 

그는 1873년에 트로이 성터를 발굴하고 1876년에는 미케네 성터를 발굴함으로써 호메로스 서사시의 역사성을 입증하였다. 미케네 문명은 평화적인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호전적인 기풍을 지닌 전사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케네 사회는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 찬 불안한 사회였던 것 같다. 아마 정복민인 그리스인과 선주민 사이의 갈등, 그리스인들 간의 대립과 전쟁, 그리고 외적 침입의 위협 등이 당시 사회의 불안요인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그러나 분산된 소규모 왕국의 지배자들은 그래도 상당히 광범위한 권력과 부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인력을 들여 건설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적인 성채와 무덤 유적이라든지, 선상 문지 B로 쓰인 문자판의 내용이 물품목록, 인원 명부였음을 감안할 때, 그 지역 지배자들의 통치가 상당히 강력하고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400년경의 크레타 정복, 기원전 1300년 중엽의 트로이 공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동부 지중해의 강자로 성장했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700년에서 1400년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점차 쇠퇴하여 기원전 1100년경에 멸망했다.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후 약 300년 동안은 그리스 역사에서 암흑기라 불려진다.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미케네 문명이 파괴된 이후의 문화 수준이 어둠에 비길 만큼 미개하고 궁핍한 상태로 전락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사정을 알려 줄 만한 자료 자체도 드물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탓이기도 하다. 이 암흑기는 미케네 문명의 말기에 그리스로 이주해 온 도리아인과 선주민들이 이동과 정착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암흑기가 지나고 기원전 800년 경이되면 폴리스가 출현하면서 새로운 면모의 서양 역사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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