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플즈
말레이에도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세력이 진출하였으나 겨국 영국한테 밀렸다. 영국은 프랑스혁명 때 네덜란드가 점령 당한 틈을 이용하여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손에 넣고, 말레이반도는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려주지 않았다. 1819년 래플즈는 싱가포르에 영국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824년에는 영국-네덜란드 조약에 의거하여 말라카와 싱가포르가 영국에 귀속됨으로써 1826년 말라카, 싱가포르, 페낭을 합하여 해협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초 타이는 이미 말레이 북부 4개 속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의 진출로 페라크와 셀랑고르에의 진출은 포기하였다.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1867년 영국 식민성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영국은 1895년 해협식민지를 제외한 말레이 남부에 말레이연방을 조직했고, 1909년에는 타이로부터 북부 4주를 할양받았다.
우엔 왕조와 베트남 칭호
베트남에서의 찐씨와 우엔씨 간의 오랜 대적 관계는 18세기 말 서산당 사건에 의해 종식되었다 우엔 반 후에를 중심으로 한 3형제 반란은 결과적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였다. 우엔 반 후에가 요절한 후 프랑스 선교사 피뇨의 도움을 얻은 우엔폭 안은 후에에서 즉위하여 우엔왕조를 열었으며, 청으로부터 최초로 베트남이란 국호를 인정받았다.
제1차 사이공조약
프랑스는 밍망제의 가톨릭 금령과 선교사 살해로 무력침공을 결심하고, 뜨득제 때인 1858년 다낭을 점령, 1862년에는 제1차 사이공 조약을 강요하여 교지지나의 동부 3성을 빼앗고, 가톨릭 포교의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다. 1874년의 제2차 사이공 조약에서 베트남은 서부 3성의 프랑스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1883년 제1차 후에 조약에서 프랑스는 베트남의 외교권을 박탈하니,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과의 사이에 청불 전쟁이 일어나 1884년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제1차 천진 조약이 맺어지고, 이어서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제2차 후에 조약이, 1885년에는 최종적으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제2차 톈진조약이 체결되니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항불운동
이후 톤 탓 두엣, 판 딘 풍, 호앙 호아 탐의 항불운동은 유명하며 명치유신을 본받으려는 고나보이 차후의 독립운동이 있었고, 판 추친은 하노이에 동경의숙을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불령인도지나
캄보디아는 18세기 말부터 타이와 베트남의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1862년 인도지나에 진출한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다.
1866년과 1885년의 반불 폭동에서 크메르 민족주의가 일어났지만, 결국 캄보디아는 1887년 프랑스 인도지나 총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라오스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는데, 이른바 불령 인도지나가 성립한 것이다.
동인도회사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바타비아에 설립된 이래 네덜란드인의 독무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처음에는 무역을 목표로 하였지만 점차 영토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어 수마트라와 자바로 진출하였다. 동인도회사가 점차 무능한 기관으로 전락하자, 1798년에는 동인도회사를 해산시키고 네덜란드 정부가 직접 관장하였다.
단델스
1801년부터 10년간 네덜란드의 단델스는 영국에 대한 방위능력을 길렀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네덜란드 본국이 점령된 후, 네덜란드의 동인도제도는 1811년 영국에 점령되었다. 이로부터 5년간 자바는 래플즈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짧은 통치였지만 성공적이었다.
나폴레옹의 패전 후 영국은 유럽에서 프랑스 세력을 누르기 위해 네덜란드에 이 지역을 반환하였다. 네덜란드의 350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 지배는 19세기 초까지는 무역의 이익 확보가 주된 목표였고, 19세기 중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신민지 정책을 취하였다.
부디 우토모
처음 조직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단체는 1908년에 자바 지식인들이 주동이 된 부디 우토모였고, 이는 이슬람교가 서양세력에 대처하기 위한 구심점이 되었다.
필리핀의 민족주의.
필리핀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도전을 물리치고 에스파냐가 완전히 필리핀을 차지한 것은 1837년경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필리핀 청년들이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에 유학함으로써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자치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필리핀인의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게 되었다.
아그날도의 독립투쟁
1896년 리살이 에스파냐 당국에 의하여 처형당하자 민중운동이 점차 격화되었다. 당황한 에스파냐는 아그날도와 비아크나바토 조약을 체결하여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나 쿠바문제로 미국과 에스파냐 간에 전쟁위기가 보이자, 아그날도는 1898년 5월 조약을 파기한 다음 에스파냐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6월에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미서전쟁은 에스파냐의 참패로 끝나 1898년 12월 파리조약에서 필리핀은 푸에르토리코, 괌과 함께 미국에 할양되었다. 필리핀은 미서전쟁에서 미국을 도왔지만, 필리핀이 미국의 영유로 결정되자, 아그날도는 과감히 반미항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1901년에 아그날도는 체포되고 말았으나, 그 후로도 게릴라 항쟁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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