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사

근대인도문명 5편.

by 니루루 2022. 9. 28.

 

간디의 등장과 독립투쟁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틸락이 사망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민족운동진영은 분열되어 있었다.

반면에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식민착취를 극대화하였고 강권통치로 일관하였다.

이때 간디가 등장하였다.

그에게는 인도민족의 단합이 기본 전제였고, 그 위에서 완전자치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폭력을 쓰는 상대방에게 진리에 기초한 비폭력의 힘으로 저항하여

양심의 가책과 사랑을 유발시켜 승리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이를 사티야그라하라 한다.

간디는 1919년에 로울라트법안이 통과되자 하르탈(파업)을 사용하여 저항하였다.

이 법안의 뼈대는 인도인을 영장이나 재판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고,

언론 사상 집회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민중은 종파에 관계없이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19년부터 이슬람들에 의해 주도된 킬라 파트 운동에

힌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더욱 상승하였다. 

1919년에 전 인도에 걸친 심각한 하르탈이 일어나자

영국군은 아므리트사르에서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이에 반발한 인도민중의 폭력투쟁이 일어나자 간디는 단식을 통해

인도 민중의 폭력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일체의 영국 통치를 거부하는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킬라 파트 운동의 퇴조와 함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민 불복종 운동의 실패 이후 간디에 대한 비판과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분열,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크게 일어나는 한편, 무력투쟁이 부상하였다. 

이에 영국은 1927년에 인도의 자치문제를 검토하고자

사이먼위원회를 인도에 파견하였으나 인도 국민회의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를 계기로 다시 인도인들의 단합한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1929년 인도국민회의는 완전자치를 천명하였고

간디 주도로 완전자치를 향한 제2차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933년 이후 그의 지도력에 대한 민족지도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의 전면에서 다시 퇴전하였다.

이후 그는 '건설적 계획'을 기초로 농촌경제부흥과 사회개혁을 시도하였고

이를 통해 인도의 완전자치와 인도 민중의 물질적 사회적 복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인도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킬라파트운동은 전 인도의 모든 구성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이것은 힌두 이슬람의 단합을 가져다주었지만 종교가 정치에 혼입 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후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정치세력화가 활성화되면서 종교분파주의가 구체화되었다.

종교 분파주의는 진나가 간디 방식에 의한 시민 불복종 운동에 반발하면서 그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1940년에 두 개의 국가이론을 바탕으로 이슬람들만을 위한 파키스탄의 건국을 주장하였다.

1942년 자치정부의 실현에 대한 협상을 위해 인도에 크립스위원회가 파견되었다.

민족지도자들은 그들과의 협상에 실패한 후 반영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인도 국민회의에 복귀한 간디는 영국의 '인도 철수'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또다시 투옥되었고 거의 전국에 걸친 반영 무력투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세력이 결성되었다.

또 보스가 일본을 거점으로 조직한 인도국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동시에 이슬람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파키스탄 건국운동이 드세게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영국은 내각위원회를 파견하여

연방제를 기본골자로 한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하였다.

인도 국민회의와 이슬람 리그 양측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양자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몇몇 사항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힌두 이슬람 사이에 엄청난 폭력 참사가 잇따랐고

급기야 이슬람 리그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이슬람문화권을 파키스탄으로,

나머지는 인도로 독립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캐시미르를 비롯한 인도 내의 이슬람 토후 군주국들에 대한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 1947년에 인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