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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유고슬라비아 전쟁 5편. 티토의 파르티잔의 활약과 독일군의 티토 암살작전

by 니루루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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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1. 11일 만에 끝난 전쟁

단 11일 만에 끝난 유고슬라비아 전쟁. 그런데 이 승리가 나중에 유고슬라비아에게 전화위복이 됩니다. 독일군이 워낙 급박하게 전쟁에서 승리를 하다 보니까 유고슬라비아 군인들의 무장해제를 제대로 시키지 않았더니 그 무장해제하지 않은 군인들이 항복에 굴하지 않고 산으로 숨어들어 간 겁니다.

 

2.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한편, 독일군을 유고슬라비아를 칩입할 당시 맞서 싸우기보다는 해방군으로 반갑게 맞이한 크로아티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을 세우고 민병대를 강화합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쪽 다 민병대가 조직되었는데, 크로아티아에는 민병대 우스타샤가 있었고 세르비아 쪽의 민병대는 체트니크가 있었습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자들의 무장집단이고, 체트니크는 오스만 제국에 저항해오던 세르비아의 무장 반란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세계 2차 대전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무장 집단화 조직이 됩니다.

특히나 우스타샤는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롤모델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헝가리에 테러리스트 훈련 캠프를 설립합니다. 이들이 얼마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냐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1대 왕 알렉산다르 1세를 프랑스 마 유세유에서 암살을 하기에 이릅니다. 독일은 이러한 크로아티아를 인정하여 독립국 지위를 인정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군대를 창설, 모집하기 시작합니다. 크로아티아 독립군은 이 기회를 잡아서 유고슬라비아 내의 다른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오래 묵힌 원한을 앙갚음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 땅에 사는 수많은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만들어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등 약 10만 명을 학살합니다. 세르비아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보복하기 위해서 세르비아 쪽 체트니크에서도 세르비아 땅에서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양쪽 간의 치열한 학살극은 독일마저 꺼릴 정도였습니다.

 

 

 

3. 티토의 등장

이 와중에 또 다른 강력한 저항세력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유명한 티토가 등장합니다. 티토는 이미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의 신임을 받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총서기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티토는 파르티잔 활동을 하고 싶어 했지만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티토의 파르티잔 활동을 제지당합니다. 그러다가 독소전쟁 발발 후 독일을 공격하라는 지령이 내려지고 이때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군인 파르티잔을 조직합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 축출이 목표였고, 이 점에서 세르비아의 체트니크와 목표가 같았지만 방식에서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단 체트니크의 지도자 미하일로비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따라서 독일에게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은 연합군에게 무너진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일에게 힘 빼지 말고 대신 이 기회를 틈타서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쳐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분리주의자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체크니크는 독일군 소탕에 소극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반면에 티토의 파르티잔은 독일 소탕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이들의 활동에 당하다 보니까 세르비아에 대해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독일군 1명 사망 시 민간인 50명 처형이라는 강수를 둡니다. 이러한 정책은 주민들로 하여금 독일군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자극하게 하였습니다. 그 증오심이 민간인들로 하여금 파르티잔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했습니다. 파르티잔이 주민과 친했던 이유는 그들의 생존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파르티잔의 게릴라 활동은 주 활동 지대가 산이었기 때문에 보급이 매우 중요한데, 이 보급이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파르티잔이 전국적으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파르티잔이 가지고 있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도움이 컸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7월 4일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 날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독일과 전쟁을 선포한 날이었고, 후에 유고연방 당시 이날을 국경일로 할 정도였습니다. 계속되는 유고슬라비아 무장세력의 등장과 습격에 독일도 파르티잔 토벌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 시작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기록으로는 크게 7번의 대 토벌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백색 작전

먼저 독일군은 제 7ss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 등 정규 사단 4개를 투입해서 1943년 1~4월까지 백색 작전(fall weiss)을 벌입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을 광범위하게 포위하려는 작전을 펼치지만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서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갑니다. 이를 인지한 독일군은 5월에 다시 흑색 작전(fall schwarz)을 벌입니다. 이때는 독일군이 최정예부대인 제1산악사단을 투입합니다.  독일군은 몬테네그로에 있는 파르티잔 근거지를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이때 당시 영국은 사실 유고슬라비아가 독일군에게 맞서기 시작한 게릴라전 초반에 체트니크를 지원했었습니다. 왕정과 친한 영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독일군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영국은 티토의 파르티잔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비밀 특사단을 파견하여 파르티잔의 활약상을 정찰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윌리엄 디킨 대위가 있습니다. 디킨 대위는 파르티잔의 활약상을 보고 나서 영국에 긍정적인 보고서를 보내게 됩니다. 디킨 대위는 윈스터 처칠 총리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디킨 대위의 보고서를 본 처칠 총리는 본격적으로 파르티잔을 지원할 것을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이후 독일 5차 토벌전 이후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공식적으로 티토를 지원할 것을 선언합니다.

티토는 이런 정세에 맞게 굉장히 유화적인 정책을 펼칩니다. 우리는 독일을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사유재산, 사기업 모두 인정해주고 전후에 총선거 실시까지 약속해줍니다. 1943년 후반에 아드리아해 남쪽 해안 쪽은 독일군의 방비가 약했기 때문에 이쪽을 통해서 티토에 대한 영국의 지원물자들이 쏟아져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강력하게 무장해서 파르티잔 세력은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이젠 파르티잔 토벌이 쉽지 않았던 독일군은 1944년에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밀리기 시작합니다.

 

5. 티토 암살 작전

독일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티토 암살작전을 계획합니다. 이전에는 포위망을 좁히는 방식으로 파르티잔을 압박했었지만 이제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곧바로 티토 및 파르티잔 지휘부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름바 뢰셀 스프룽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독일 무장 친위대 소속 특수 공수부대를 투입합니다. 이 암살 임무 책임자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불리는 오토 슈코르체니에게 맡깁니다. 독일군은 글라이더로 티토 사령부가 있는 드르바르에 낙하한 후 거점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티토를 거의 잡을 뻔하지만 결국 놓쳐버린 독일 공수부대는 그대로 파르티잔의 반격으로 섬멸당합니다. 독일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간 티토는 비스 섬이라는 조그만 섬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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