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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도 위조화폐는 당연히 있었고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고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법정화폐 대신에 소금이나 쌀, 가축 등을 이용하여 물물교환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동전이 만들어지고 활발하게 유통이 되면서 위조화폐 문제는 꾸준히 발생했는데요. 17세기 말에 이르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화폐를 위조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구리로 동전을 위조하기 위해, 놋그릇 절도가 횡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위폐를 보면, 함석을 사용하지 않고 구리와 납만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주조된 동전보다 가벼웠는데, 일반 백성이 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심각함을 느낀 조선 숙종은 화폐를 위조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하는데요. 동전을 불법 주조한 장인..
외국인들도 놀란 한민족의 대식 습관 현대 사람들은 다이어트 열풍이 불면서 밥을 조금씩 먹는 식습관이 익숙해졌지만, 우리나라는 할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밥을 고봉밥으로 많이 먹던 나라였습니다. 당대 기록을 살펴봐도 조선시대 식문화에 대해 외국인들 기록에서는 '조선인은 식사량이 많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임진난 당시 이여송은 조선인들의 고봉밥을 보고 놀라서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니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었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봐도 무열왕이 하루에 먹는 양은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잡수셨다고 나와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식사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옛날에는 왜 그렇게 밥을 많이 먹었을까요? 대식 기록은 재력과시의 한 표현 무열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
1. 아테네 민주정 발전의 배경 한편 아테네 인들은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아테네 인들도 초기에는 상류 가문의 대지주인 귀족들만이 폴리스의 국정에 참여하는 귀족정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전투방식은 기병 중심의 전술이어서 말을 사육하고 전차 등의 값비싼 전투장비를 스스로 구비할 수 있는 토지 귀족층이 국가의 방위를 전담하던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명문가문으로서의 부와 위세, 그리고 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헌을 바탕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귀족세력의 정치독점에 대한 도전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식민 운동 이후 부쩍 활발해진 교역활동과 수공업 생산에 힘입어 부유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군사전술상의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폴리스들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정복자인 도리아인의 국가로서 선주민을 예속시켜 강압적으로 지배한 전형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스파르타인은 초기의 귀족제에서 민주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과두제 체제를 굳혔다. 한편, 아테네인들은 이오니아 인들의 국가로서 민주제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국가였다. 스파르타인은 육군 국가여서 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의 내륙지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아테네인은 해상국가로서 에게해 연안의 국가들과 섬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파르타인의 사회 스파르타인은 정복국가로서 소수의 자유시민들이 다수의 피정복민을 무력으로 지배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래서 국가우녕의 절대적인 목표는 다수의 피정복민을 통제할 수 있는 훌..
1. 폴리스의 형성 기운전 8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 폴리스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들이 나타났다. 암흑기 이전의 국가들이 왕국 체제를 유지했던 반면 폴리스는 시민들의 공동체 국가였다. 폴리스라는 말이 원래 '성채'라는 뜻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폴리스의 형성은 암흑기의 불안한 시대에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지키려는 군사적 공동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군사적 요새가 발전하여 부근 주민들의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인근 해당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폴리스였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 중심지에 해당하는 도시와 그 주변부의 농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 몇몇 상업국가를 제외하고는 폴리스 도시 중심지의 경제적 역할은 미미한 편이..
크레타 문명 고대 서양의 문명은 지중해에 자리 잡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의 고대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에게해 남쪽에 살던 크레타인들이었다. 이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이룩한 지중해 최초의 청동기문명이 크레타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의 유적을 발굴한 공로자는 영국인 고고학자 에반스였는데, 그는 1900년에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터를 발굴했다. 당시 크레타는 한 명의 강력한 왕에 의해 통치되는 통일왕국이 아니고, 여러 왕들이 각기 자신의 영역을 분할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는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및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교역과 수공업의 번성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