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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고대 로마 문명 1편 : 공화정의 붕괴와 로마제정의 수립

by 니루루 2022. 12. 13.

로마의 지중해 팽창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로 팽창을 시작하면서 마주친 첫 상대는 카르타고인이었다. 당시 카르타고 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주변의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섬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만큼 서부 지중해 제일의 강력한 해상국가였다. 이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이 서부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 바로 포에니(Phoeni) 전쟁이었다. 포에니 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제1차 전쟁 (B.C. 264-241)은 로마인의 승리였다. 로마인은 카르타고인으로부터 맺은 시칠리아를 로마의 속주(provincia)로 편입시켰다. 속주는 자치권이 없이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로마에 대해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과정에서 보여준 로마의 관대한 정책과는 대조적인 로마의 이 직접통치 정책은 이후 로마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전쟁 (B.C. 218~201)에서는 한니발(Hannibal)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결국 로마군이 자마(Zama)의 싸움 (B.C. 202)에서 또 카르타고 군을 격파했다. 카르타고인은 무장해제당하고 해외영토인 에스파냐를 빼앗겼으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제 사실상 카르타고의 영광은 사라지고 서부 지중해에서 로마는 독보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마다하는 카르타고인을 억지로 전쟁에 끌어들여 제3차 전쟁 (B.C. 149~146)을 벌였고 카르타고인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 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는 동안 헬레니즘 세계의 마케도니아 왕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로마인들은 그 마케도니아 전쟁(B.C. 214~148)에서 당시 정치적 불안과 인접국들과의 분쟁으로 위약해진 상대를 정복하여 속주로 삼고 곧이어 그리스와 소아시아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아직 시리아와 이집트가 로마 영토에 편입된 것은 아니지만, 기원전 2세기 중엽의 로마는 이제 지중해를 총괄적으로 지배하는 대국(大國)이 되었다.

로마팽창의 경과

 

이러한 팽창은 로마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으로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본격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속주로부터 막대한 부(富)를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혜택은 상류층인 원로원 계층과 그 아래의 기사 계층에게 주로 돌아갔고 그들과 함께 싸웠던 시민군 병사와 동맹국 군대는 기대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특히 로마 군대의 주축인 농민의 사정은 전에 비해 악화되었다. 오랫동안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곡물생산이 현저히 지속되는 전란(戰亂)으로 농지(農地)가 황폐화되었다. 더욱이 전리품의 분배과정에서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역량을 잃게 되고 토지를 부유한 지주들에게 팔아넘겼다. 이런 중에 농민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킨 것은 막대한 전쟁포로 출신의 노예 노동력이 농촌에 대거 유입된 것이었다. 대지주들은 빈곤해진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여 확장한 대토지 농장 (latifundium)에 대규모의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수익성 높은 과수재배에 열을 올렸다. 토지를 잃고 노예에게 일자리도 뺏긴 농민들은 무산자(無産者들(proletarii)이 되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고대도시 로마에 이들을 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생산시설이 있을 리 없었다. 자연 이들은 로마 정부의 구호를 바라는 사회불안세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곡물부족의 위기

 

로마농촌의 위기와 농민의 이농(農)은 전통적인 농촌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운영에 큰 장애가 되었다. 로마의 중추 인력은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영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무장을 갖추어 국가의 군대에 병력을 제공했고 세금을 내어 국가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런즉 이 자영 농민층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로마의 군사력 약화와 조세수입의 감소를 의미했다. 또한 대지주들이 올리브, 포도 등의 과수재배를 중심으로 라티푼디움 경영을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의 곡물생산이 전반적으로 감소한 데다, 로마인의 곡창지대인 시칠리아에서 기원전 139~131년 사이에 노예 봉기가 일어나서 곡물 부족의 위기까지 대두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개혁가로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그라쿠스형제였다. 형(兄)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기원전 133년에 농지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지주들의 공유지 소유 상한선을 지정하고 그 이상의 공유지를 몰수하여 토지 잃은 농민들에게 임대 형식으로 분배하려는 의도였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는 기원전 123년에 곡물 부족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곡물법을 제정했다. 그들의 목적은 자영 농민층을 육성하여 전반적인 로마의 안정을 기하자는 것이었지만, 원로원 세력이 그 개혁 법안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 원로원 세력은 그라쿠스 형제가 평민 세력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들의 물질적인 기득권과 정치적 권력을 잠식하려 한다고 보아, 이들 형제에게 테러를 가해 제거했다.

공화정 말기의 내정기

 

그라쿠스형제의 개혁 실패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內戰)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사회불안요인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에 편승한 정치가들의 분란이 계속 이어졌다. 공화정 말기 내란기의 정치가들은 당시 사회문제의 해결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를 기준으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평민회를 기반으로 하는 평민과 (populares) 정치가들은 그라쿠스형제의 개혁의 기치를 이어받아 건실한 자영농을 회복시키기 위한 귀족들의 양보를 주장했다. 반면 원로원을 배경으로 하는 귀족과(optimates) 정치가들은 평민과의 주장이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공화정 본연의 원칙에도 위배된다는 논리로 개혁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평민과 정치가들 역시 귀족들이었고, 그들이 평민과를 자처한 것은 진정한 개혁의지에 따라서라기보다 정권 경쟁 속에서 원로원 세력에 대항할 정치적 배경을 얻으려는 계산에서였다.


공화정 붕괴의 배경


그라쿠스 형제 개혁 이후 계속된 정치적 분란(亂)은 차츰 공화정의 종말을 가속화했다. 공화정의 핵심기구인 원로원이 국가의 현안을 합법적인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데다, 마리우스(Marius)의 병제개혁 (B.C. 107)으로 군대가 사병화(私兵化)되자 공화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약화된 로마 시민군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빈민 중에서 지원군을 모집하여 무장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49년에 갈리아(Gallia) 총독 케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제휴에 대항하여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너 로마를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속주의 토지를 제대 병사들 (veterani)과 빈민들에게 제공하고 노예노동을 제한하여 자유인의 고용기회를 늘리는 등의 치적으로 평민들의 인기를 누렸으며 속주풍를 개선하여 속 주민의 부담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개인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려다 기원전 44년에 공화주의자인 브루투스(Brutus) 일파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안토니우스(Antonius), 그리고 레피두스(Lepidus)가 연합하여 반(反) 카이사르 파 에 대항하는 제2차 삼두정치(三頭政治)를 구축했다(B.C. 43), 그러나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 69~30) 여왕의 연합세력을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Actium) 해전에서 물리침으로써 100여 년에 걸친 로마의 내전이 끝났다.


로마제정의 수립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父) 카이사르의 비극을 상기하고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는 기원전 27년에 "국가를 나의 통제권으로부터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손에 넘겼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까지 받았다. 그는 자신을 프린켑스 라 자처하며 자신이 로마 시민들 가운데 제일가는 시민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지배체제를 프린켑스의 지배, 즉 프린 키 파툼(원수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군대와 재정에 관한 핵심적인 권한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지배는 사실상 1인 지배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지배체제인 공화정을 마감 짓고 새로 제정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로마의 평화


장기간의 내전기를 수습한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제국의 전반적인 안정을 꾀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인정치가의 재등장을 막기 위해 군대조직을 정비하여 자신이 로마군의 최고통수권을 장악했으며, 숙주에는 상비군을 주문시켜 국방과 치안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시민의 편의를 위한 공공시설들을 건설하였으며, 숙주 통치제도를 개선하여 내치 안정을 이루었다. 로마를 안정과 번영으로 이끈 아우구스푸스의 치세(BC. 31~A.D. 14)를 기반으로 로마제국은 향후 200여 년 동안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누렸다. 로마의 평화는 로마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들, 즉 시민들 간의 빈부격차, 자영 농민층의 쇠퇴와 도시로의 인구집중, 속주의 여러 민족들의 반발, 기나긴 국경선의 방어에 필요한 '인력부족, 노예제의 위기 등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바탕으로 이룩된 진정한 평화가 아니고 로마제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물질적인 풍요. 그리고 뛰어난 행정력에 의해 통제된 평하였다. 로마의 지배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그 광대한 영토속에 잠재된 온갖 불협화음과 모순들을 어떻게 적절히 억제하며 무리 없이 거대한 제국을 잘 통치하느냐의 문제였다. 로마의 지배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선택한 방식은 일시적인 호도 책과 강압적인 통제였다. 그들은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배급하고 그들에게 전차 경주와 격투 시합 등을 구경거리로 제공하여 오락을 즐기는 가운데 현재의 고통과 불만을 잊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소위 '빵과 서커스'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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