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부리 시대와 라타나코신 왕조
타이는 1767년 미얀마의 싱뷰싱 왕의 공격으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화교 탁신에 의해 톤부리 시대가 열렸으나 15년 만에 멸망하고, 차크리에 의해 라타나코신 왕조가 세워지면서 유럽 열강의 끊임없는 통상조약 요구를 받게 되었다.
라마 2세 말년인 1822년 영령 인도에서 크로퍼드를 파견하여 통상체결을 요구하였으나 포올콘 사건 이래 서양 제국에 대한 두려움에서 거절되었다.
이러한 통상의 요구는 거절하면서도 역대 왕들의 영토확장정책은 결실을 맺어 일부 라오스지역, 캄보디아의 시엠리아프, 바탐방, 말레이시아의 케다, 펄릿, 케란탄, 프랑가누 지방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
버니 조약
그러나 타이는 라마 3세 때인 1826년 영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버니 조약을 체결하고, 1833년에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같은 조약은 호혜적인 성격이어서 영미 양국에 큰 무역상 이익을 주지 못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 청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같은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기 위하여 1850년에 영국은 브룩을, 미국은 발레스티어를 방콕에 파견하였으나, 라마 3세는 끝까지 새로운 조약 체결을 거절하였다.
바우링 조약
라마 4세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1855년 바우링 조약을 체결하니 타이가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 제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불평등 조약의 결과 타이는 서양 제국에게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반주권국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타이의 독립 유지
이러한 때에 라마 5세가 즉위하여 제반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였다. 출라롱콘은 타이의 독립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1907년에는 프랑스에 시엠리아프, 바탐방 지방을, 1909년에는 영국에 케다, 펄릿, 케란탄, 트랑가누의 4개 속주를 할양하면서 치외법권의 이완을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양대 세력권 사이의 완충국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타이의 외교적 노력이 타이로 하여금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가가 되게 하였다.
양드보 조약
영령 인도와 미얀마 사이가 악화하기 시작한 것은 친 비얀 사건 이후였다. 이후 바기도의 무모한 팽창정책은 영령인도측에 구실을 주게 되어 1924년 제1차 영국 미얀마 전쟁이 발발하는데, 그 결과 1826년 양드보 조약이 체결되어 아라칸과 테나세림지방을 영국에 양보하였다.
페구할양
바기도의 뒤를 이은 타라와디는 양드보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파간 민 역시 반영 정책을 취하니 결국 1852년 제2차 영국 미얀마 전쟁이 벌어졌다. 이 결과 페구가 영국에 할양되니 영국은 아라칸-페구-테나세림을 연결하는 하부 미얀마를 지배하게 되었다. 페구의 점령은 인도로부터 영국 제국주의의 팽창을 가져다주었고, 이에는 바기도, 타라와디, 파간 민 등 역대 왕들의 실정과 영국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가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탓이기도 하였다.
민돈 민과 신발문제
민돈 민은 미얀마의 자유 향유가 영국의 기분에 맞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접근은 결국 영국으로 하여금 강경책을 쓰게 만들었다. 1873년 신발 문제로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양국이 긴장하였으니 민돈시대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3차 영국 미얀마 전쟁
티보는 민돈과 같이 프랑스에 접근정책을 폈으나 민돈과 같은 외교 기술이 없었고, 1880년대 상황은 1870년대 상황과는 아주 달랐다. 중국통상로를 위해 영국 상인들은 영령 인도 정부가 상부 미얀마에 간섭해 주기를 바랐다. 영국은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자 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티보는 프랑스의 군사원조를 확신하고 영령 인도와의 최후 결전을 원하였다. 그러나 1885년 9월 미얀마에 군사원조를 약속한 페리가 물러나고 페리의 팽창정책에 반대한 프레시네가 등장함으로써 미얀마는 프랑스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화난 영국은 제3차 영국 미얀마 전쟁을 일으켜 상부 미얀마를 병합하였고, 1886년 1월 1일 미얀마는 영령 인도의 한 주가 되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미얀마 연구학회
미얀마인들의 반식민주의 운동은 반영 감정, 반인 감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반인 감정은 인도인이 영국인을 따라서 미얀마 행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양드보 조약 이후 영국 세력이 미얀마에 진출함에 따라, 미야마 전통을 고수하려는 전통주의 저항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미얀마인 고유의 관습 문화를 지키기 위해 우 마이 오웅을 중심으로 1910년 미얀마 연구학회가 창립되었다. 이 미얀마 연구학회는 미얀마 문화의 재발견과 재인식을 통하여 미얀마 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불교청년회
이러한 전통주의 운동은 1906년에 불교청년회가 창설되어 본격화되니 우 마이 오웅, 우 킨, 우 바폐가 중심인물이었다. 불교청년회는 처음에는 비정치적이었으나 영령 인도 정부의 압력이 가중할수록 민족주의적 정치조직으로 탈바꿈하여 갔다.
동남아시아 역사 3편.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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