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박지성 선수의 선수시절 일대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지성 선수에 대해 잘 모르거나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본문글을 확인해주세요.
1. 출생과 어린 시절
박지성은 1981년 2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서 전남 고흥으로 이주해 자랐습니다. 그는 부유하지 않았지만 집안의 외아들로 축구선수 윤정환과 브라질의 둥가를 보며 꿈을 키워나갔다고 합니다. 박지성은 1990년에 아버지의 사업으로 수원으로 이사 오게 되었고, 그는 작고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여기저기 재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미키마우스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원 산남 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축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수원 세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집에서 버스로 30분을 이동해야 했지만 축구를 너무나 사랑했던 박지성은 6개월이나 이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박지성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실력이 늘기시작합니다. 박지성 아버지도 처음에는 아들이 축구에 재능이 있는 것인지 반신반의했지만 박지성이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하고 난 후에는 아들의 축구재능을 확신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됩니다.
2. 중고등학교 시절
박지성은 중학교 시절 자신의 학교를 도내 상위권으로 올릴 만큼 뛰어난 축구재능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7번을 사용했으나 안용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13번을 사용하며 경기도 4개 대회를 우승하며 득점왕을 거머쥡니다. 그러나 수원공고로 입학할 때까지 여전히 체격은 왜소했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박지성은 17세 이하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게 됩니다.
수원공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학종 감독은 박지성의 체력을 보완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박지성의 괴물 같은 체력의 기본기가 다져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박지성의 부모님도 아들의 체격을 키우고자 개구리즙 등 각종 보약을 먹이며 정성을 쏟았고 그 노력 덕분에 아주 왜소했던 박지성은 158cm에서 170cm까지 클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진학할 당시 박지성은 슈퍼 유망주 급은 아니었지만 축구선수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고 이후, 이학종 감독의 강력한 추천으로 명지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3. 대학교 시절
1999년 명지대에 입학한 박지성은 현재 포천 축구 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희태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박지성이 명지대에 입학하기 이전부터 명지대 축구부와 울산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 마침 울산으로 전지훈련을 왔던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하게 되고, 여기서 왼쪽 윙백으로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바로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게 됩니다.
처음에 허정무 감독이 박지성을 올림픽 대표로 선발했을 때는 주변에서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뛰어난 구석이 없는 어린 선수를 바로 대표팀으로 선발한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 많았지만 허정무는 2년 후에 누가 맞는가 보자며 박지성에게 꾸준한 기회를 주게 됩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서 19살의 박지성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2승 1패를 하고도 8강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명지대 2학년이 되고, 교토 퍼플상가로 진출하게 된 박지성은 어린 나이에 연봉 5억이라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으로 J리그에 입성합니다.
당시 K리그에서 최고 연봉자인 김도훈의 연봉이 3억이 좀 안되었는데, 신인에게 5억을 주는 구단은 당연히 있을 리 없었고, 대학시절 뛰어난 유망주였던 박지성에게는 최고급 대우였습니다.
4. 월드컵 국가대표가 되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은 박지성은 히딩크의 선택을 받고 월드컵 국가대표가 되는데요.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직전 열린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동점 헤더 골을 넣은 데 이어 며칠 뒤에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는 김남일의 롱패스를 받아 중거리슛으로 동점을 만들어내는 등의 활약을 펼치면서 본격적으로 국민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멋진 골을 넣으면서 16강 진출에 결정적인 활약을 한 박지성은 이탈리아전에서도 설기현의 동점골 과정에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박지성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해낸 2002년 국가대표 멤버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5. 교토 퍼플상가 시절
월드컵이 끝난 후 교토 퍼플상가로 돌아가 소속팀에 매진하면서도 일본어를 착실히 배우는 한편, 기자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노력파였던 박지성은 팀을 1부 리그에 재진입시킬 뿐만 아니라 일왕배 전 일본 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시키게 됩니다.
사실 일왕배 결승전 전날인 2002년 12월 31일 계약이 만료되었으나 박지성은 팀을 위해 무보수 출전을 단행하며 1:0으로 지고 있던 팀이 후반 7분에 박지성의 헤더 골에 이어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1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교토를 떠나던 날 박지성이라면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와도 받아주겠다던 교토 구단주의 말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5. 아인트호벤 시절
박지성은 교토를 떠나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아인트호벤으로 이영표와 함께 이적을 하게 되는데요. 2002년 12월 20일 입단하지만 무릎 부상 등에 시달리게 되고 홈팬으로부터 야유를 받게 됩니다. 계속되는 야유와 슬럼프로 더욱 부진이 깊어졌던 박지성은 후에 인터뷰에서 난생처음으로 경기에 뛰는 것이 무서웠고 축구를 하기 싫어진 시기였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홈팬의 야유가 너무 심해서 히딩크 감독도 원정 경기에만 박지성을 출전시키는 배려를 해줬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히딩크는 지금 J리그에는 여전히 박지성에게 오퍼를 넣는 팀이 있으니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박지성은 분명히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을 했습니다.
히딩크의 믿음에 힘입어 박지성은 점차 기량을 끌어올렸고, 2003/04 시즌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박지성은 04/05 시즌에는 주전으로 출전하며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 유럽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엄청난 활동량과 에너지로 상대팀을 괴롭히는 활약을 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PSV 사상 최고 성적인 4강까지 오르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박지성은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고 이런 활약으로 2005년 발롱도르 1차 후보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박지성의 눈부신 활약을 지켜보던 유럽팀들은 시즌 막바지부터 박지성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리버풀을 비롯해서 첼시, 바르셀로나까지 박지성에게 눈독을 들였습니다.
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다
FA컵 결승전이 끝난 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박지성에게 전화를 걸어 이적 제의를 하게 됩니다. 히딩크는 1년 더 아인트호벤에 남을 것을 권유했지만 박지성은 맨유로 가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원래 퍼거슨은 네덜란드의 맨유 스카우터에게서 박지성 영입을 추천하는 보고서를 보았고 검토하는 중이었습니다.
챔피언스 리그 8강 리옹전에 에시앙을 보러 갔던 퍼거슨은 박지성의 플레이에 반해버리게 됩니다. 박지성이 이적시에 필요한 취업비자가 나오지 않자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을 받아야 했는데, 히딩크와 퍼거슨 그리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요한 크루이프가 박지성에게 추천서를 써주게 됩니다.
2005년 69억에 맨유 입단을 하게 된 박지성은 많은 이들이 활약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초반부터 2000분 가까이 출전하면서 무난한 적응을 보인 박지성은 칼링컵 8강 버밍엄전에서 잉글랜드 무대 데뷔골을 장식했습니다. 박지성은 EPL 리그에서 33경기, 챔피언스리그에서 6경기 출장하면서 도움 8개를 기록하는 등 주전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7. 2006년 독일 월드컵과 부상
2006년 독일 월드컵이 개최되고 박지성은 1차전 토고전에서 1:0으로 뒤지던 한국 대표팀이 터뜨린 2골 모두에 관여를 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조별리그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박지성은 후반전 설기현의 측면 크로스를 조재진이 헤딩으로 떨궈준 공을 절묘하게 차서 골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1:1 무승부를 이끌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2006년 시즌 부상으로 인해 리그를 반밖에 소화하지 못하는데요. 리그 14경기밖에 못 나왔지만 5골 3 도움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07/08 시즌 부상에서 복귀한 박지성은 엄청난 활약을 펼치지만 챔스리그 결승전의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8. 08/09 시즌
이후 08/09 시즌에 맨유의 전성기가 펼쳐지게 되고 박지성은 부상 없이 주전으로 맹활약하게 되는데요. 호날두와 루니와 함께 맨유 역습의 삼각편대를 구성하게 됩니다. 챔피언스 4강 2차전 아스날 전에서는 선제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으며, 팀은 다시 결승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맨유와 바르셀로나가 다시 맞붙게 되었는데요. 이때 박지성은 드디어 선발로 뛰게 되지만 메시의 활약을 막지못해 맨유는 2:0으로 패배하게 됩니다.
9. 09/10 시즌
이후 한국 국가대표에서 김남일에 이어 새로운 주장이 된 박지성은 은퇴할 때까지 대표팀을 이끌게 됩니다. 09/10 시즌 맨유에서는 새롭게 합류한 나니와 발렌시아의 실력이 성장하면서 박지성이 경쟁력에서 밀리게 됩니다. 시즌 후반 2월이 되어서야 첫 골을 기록한 박지성은 09/10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AC밀란과의 홈경기에서 세 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4:0 승리에 일조합니다.
박지성의 시즌 베스트 장면은 리버풀 전에 선발 출장하여 후반 60분에 대런 플레처의 크로스를 받아 다이빙 헤더 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한 장면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을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으로 선언한 박지성은 월드컵 직전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넣고 둘레길 산책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일본 관중들에게 굴욕을 안긴 사건은 유명합니다. 훗날 인터뷰에서 박지성은 일본에서 선수 소개할 때 자신의 이름이 울리자 수많은 일본 관중들이 야유를 보낸 것에 대한 응답이라고 밝혔습니다.
10.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그리스 전에서는 그리스 수비수의 공을 빼앗아 골키퍼를 향해 질주하여 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경기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16강전에서 수아레즈에게 통한의 골을 내주며 탈락하게 됩니다.
11. 10/11 시즌
10/11 시즌 맨유에서는 팀원들의 줄부상으로 박지성은 주전 선발로 경기를 많이 뛸 수 있었는데요. 박지성의 인생 경기라고 불리는 11라운드 울버햄튼전에서는 전반 종료 전 후반 타임에 극적으로 혼자 2골을 몰아치며 팀의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
특히 두 번째 골은 코너에서 혼자 드리블을 치고 들어와 수비 세명을 휘저으며 넣은 대단한 골이었습니다. 이후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한 박지성은 맨유로 돌아와 챔스 8강 첼시전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고 이후 리그에서 맞붙은 첼시와의 경기에서도 중원에서 뛰어난 압박플레이를 펼치며 이바노비치를 묶어놓는 데 성공하였고, 게다가 전반에 치차리토의 골까지 어시스트했습니다.
다시 이어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와 다시 만나 선발로 열심히 뛰었지만 결구 3:1 패배. 시즌 8골 6 도움. 박지성은 연봉 86억으로 루니와 퍼디난드에 이어 3번째 높은 금액을 기록하며 2013년까지 재계약에 성공합니다.
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다
11/12 시즌에도 아스날 킬러의 면모를 보이며 아스날전에 교체 투입 2분 만에 골을 기록한 박지성은 2012년 2월 6일 맨유 통상 200경기 출장 기록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맨유는 유럽 대항전에서 고전하게 되고 7경기 연속 결장을 하게 되자 박지성은 팀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박지성은 맨유의 주전 경쟁에 곧잘 밀렸고, 그 스트레스가 엄청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2012년 7월 기자회견을 통해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88억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하게 되는데요. 퍼거슨은 끝까지 잔류를 원하며 붙잡았지만 출전 기회가 부족했던 박지성은 결국 QPR로 떠나게 됩니다.
13. QPR 시절
QPR 이적 이후 박지성의 폼은 계속 안 좋아졌는데, 리그 초반엔 리그 내에서 찬스 메이킹 횟수 1위일 만큼 좋았지만, 토트넘전 이후로 부진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마크 휴즈 감독이 경질되고 래드냅이 부임한 이후로는 박지성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영국의 축구 매체에서 QPR 최악의 선수로 지목받으며 방출이 기정 사실화된 박지성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요. 이는 박지성의 기량 하락이라기보다는 레드냅의 박지성 사용법이 실패했다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박지성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중앙 미드필더의 한정적이고 전형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게 하면서 사실상 박지성을 관심 밖으로 두었던 탓이 컸던 것입니다.
14. 아인트호벤으로 다시 돌아오다
박지성은 8년 만에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했고 연봉은 15억 정도였습니다. 연봉이 많이 깎이긴 했지만 감독이 박지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잇었던 코쿠였고, 코치가 반 니스텔루이였던 터라 뛰기 편한 조건이었습니다.
코쿠 감독은 래드냅 감독과 달리 박지성을 적재적소에 기용할 줄 알았고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내는데요. 박지성은 이적 이후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동점에 기여하는 활약을 펼쳤으며 리그 라이벌인 아약스전에서는 1골 1 도움을 기록하며 4:0 팀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15.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축구스타 박지성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던 박지성은 2014년 더 이상 선수생활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형 선수였지만 워낙 많은 시간을 무리하게 뛰어다니는 플레이 스타일 탓에 몸이 버텨내질 못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된 것이지요.
팬들의 아쉬움은 너무 컸고 국가대표가 이후 부진할 때마다 많은 이들은 박지성의 뛰어난 플레이를 그리워했습니다. 한국 대표선수들의 투박한 움직임 가운데 박지성의 플레이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으며, 소위 말하는 클래스가 다른 플레이를 선보였기에 그 빈자리는 더욱 컸던 것이지요.
자신보다 팀을 생각하는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침착함과 절제라는 미덕을 갖춘 박지성은 그야말로 축구선수의 모범답안 같은 생활을 통해 성공을 이루어냈고, 일각에서는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한 후보선수라는 비아냥을 들어왔지만 한국 축구 역사에 있어서 박지성이란 존재는 너무나 거대하며, 현재 손흥민을 비롯한 많은 유럽 진출 선수들의 토대 같은 역할을 해준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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