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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지방에서 대립하던 호조, 겐신과 신겐이 이처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이유는 교토로 가려는 다이묘들 사이의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 왜 그렇게 서둘러 교토로 가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까요? 1. 교토에 가야 전국을 통일할 수 있다 전국시대 혼란기에 전국에서 센고쿠 다이묘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각 영지에 수입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교토에 있는 천황과 쇼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생기게 되는데요. 이에 쇼군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천황이 굶주리고 계시니, 누군가 이 어지러운 교토를 정리해달라'면서 관동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어서 너희들 중 누군가가 와서 힘으로 이 무질서한 교토를 관리하라는 명분이었습니다. 신겐이나 겐신과 같은 관동 다..
반팔이나 반바지를 입고 등산하시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부상에 특히 조심하셔야 하는데요.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것에 피부가 쓸리거나 다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개껍질이나 돌멩이따위에 상처를 입기 쉽고 바닷물안에서 이런 부상을 당하면 상처가 오염될 위험도 있습니다. 적절한 응급처치가 없으면 감염이 발생하거나 심하면 쇼크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대처가 필요한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팔다리에서 출혈시 응급처치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팔, 다리에서 심하게 피가 날 때 응급처치방법 1. 상처부위를 맨손으로 만지지마세요 먼저 피가 많이 난다면 출혈응급조치를 해야하는데요. 상처부위를 맨손으로 만지지 말고 응급지혈거즈, 천으로 상처를 완전히 덮고 압박을 해야 합니..
1. 고대 그리스 문학 그리스인의 문화가 서양문화의 원류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우선 문학과 철학을 들 수 있다. 문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의 낭송 시인 호메로스가 구전가요를 정리해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 서양문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극문학(劇文學)이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국가제전을 거행하고 매년 연극 경연을 실시한 이후부터였다. 비극은 대개 신화나 전설상의 소재를 이용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가치관과 심리를 묘사하였다. 대표적인 비극시인은 아이스킬로스(B.C. 525~456), 소포클레스 (B.C. 496~406), 에우리피데스 (B.C. 485~406)였다. 아리스토파네스(B.C. 450~380?) 같은 희극 시인은 당시의 구체적인 현안문제들을 풍자하는 작..
현 러시아의 수장 푸틴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경제자문이자, 전 러시아 에너지부 차관인 블라디미르 밀로프와 SBS가 단독 인터뷰를 했는데요. 블라디미르 밀로프 전 차관은 러시아가 민간인 지역을 공습하고 있는 것은 크림 대교 폭발에 대한 보복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크림대교 폭발 이후 전격적으로 러시아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세르게이 수로비킨이 '알레포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잔학하고 냉정하며,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할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요. 밀로프는 수로비킨 사령관이 지상군을 담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지상 전투를 통해 지역을 지켜낼 능력이 없고,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군의 사기와 보급 상황을 살펴볼 때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도 위조화폐는 당연히 있었고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고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법정화폐 대신에 소금이나 쌀, 가축 등을 이용하여 물물교환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동전이 만들어지고 활발하게 유통이 되면서 위조화폐 문제는 꾸준히 발생했는데요. 17세기 말에 이르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화폐를 위조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구리로 동전을 위조하기 위해, 놋그릇 절도가 횡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위폐를 보면, 함석을 사용하지 않고 구리와 납만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주조된 동전보다 가벼웠는데, 일반 백성이 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심각함을 느낀 조선 숙종은 화폐를 위조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하는데요. 동전을 불법 주조한 장인..
외국인들도 놀란 한민족의 대식 습관 현대 사람들은 다이어트 열풍이 불면서 밥을 조금씩 먹는 식습관이 익숙해졌지만, 우리나라는 할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밥을 고봉밥으로 많이 먹던 나라였습니다. 당대 기록을 살펴봐도 조선시대 식문화에 대해 외국인들 기록에서는 '조선인은 식사량이 많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임진난 당시 이여송은 조선인들의 고봉밥을 보고 놀라서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먹으니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었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봐도 무열왕이 하루에 먹는 양은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잡수셨다고 나와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식사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옛날에는 왜 그렇게 밥을 많이 먹었을까요? 대식 기록은 재력과시의 한 표현 무열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